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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가 박성업이라는 사람에 대해 우려하면서 나의 생각을 물어왔다. 그것에 대해 나름 생각을 정리해서 메일을 보내고 있는데, 요즘 그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블로그에 소개한다. 공개를 위해 적은 글이 아니라 글이 살짝 거칠고 재미 없을 수 있다.



(이하 메일 내용)-------------------------------------------------------------------------------------------------------------------------


  이건 그냥 러프한 생각이다. 성서적인 근거를 두기보다는 현상을 내 기준으로 이해한 생각이고, 이에 대한 검증은 성경적으로 좀 더 묵상해서 정교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글을 시작한다.





일반적인 종교의 발전양상과 한국교회  

 일단 인간의 신앙은 개인신앙과 집단으로 모이는 집단 신앙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불교로 치면 소승과 대승이라고 해야하나? 자기 내면의 평안과 안식을 구하며 신과 교통하고 구원을 추구하여 개인의 해탈 혹은 구원에 이르는 것이 소승(개인)적 신앙이라면, 같은 신앙적 속성을 가진 존재들이 커뮤니티를 이루고 그들간의 유기적인 결합으로 사회적인 안정감과 공동체의식의 함양,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속한 사회를 변혁시켜 가는 것이 대승(집단)적 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종교는 개인적요소와 집단적 요소의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초기에는 개인적요소에 많은 비중을 두다 후기로 갈 수록 집단적 요소를 더욱 중요시하고 치중하게 된다.

   집단적 신앙의 정교화와 발전은 이후 개인의 신앙영역에서 오는 수행의 부담을 가볍게 경감시켜주는 효과가 있는데, 이른바 대승불교의 아미타 불 신앙이나, 창가학회의 나무묘법 연화경, 4영리로 대변되는 개신기독교의 매뉴얼화된 제자훈련, 천주교의 고해성사등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이런 집단적 신앙의 정교화는 필연적으로 복잡한 신학적 요소를 단순화 시켜 일반적인 대중에게 보다 쉽게 다가가게 하고, 이런 일반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역자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신앙에서 집단신앙으로 비중이 옮겨간 종교집단에서는, 카리스마적인 선각자인 종교리더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들의 큰 가르침을 통해 무매한 대중이 가르침을 얻는 도식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집단적인 신앙의 발전은 교세를 증진시키고 강력한 집단적 영향력을 구사하게 된다. 이런 발전일로를 겪다보면 개인의 신앙보다는 그 해당 집단의 모임이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고, 커다란 일을 위해서 개인이 희생해야 하는 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거대해진 집단에 정점에 있는 그룹이 욕심을 가지게되면 이 집단은 점차 부패하여 영향력을 잃어가고, 얼마 안되어 개인 신앙에 촛점을 맞추는 회심이 일어난다. 이는 일반적인 종교의 발전양상인 것이다.

    집단신앙의 발전양상에는 어떤 패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간략하게 설명하면 초기의 집단신앙은 밖으로 팽창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후기로 갈수록 집단신앙은 그 집단을 유지보수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팽창의 가장 큰 도식은 선교이다. 새로운 구성원을 모집하고 모으는 것이 선교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다. 7~80년대 젊은 한국 교회를 생각하면 이런 선교의 도식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의 단순화된 도식에 의한 원초적인 선교부터, CCC"나는 찾았네" 라던가 사영리 등은 팽창을 위한 관심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역시 큰 집단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90년대 초반 한국교회는 정점을 찍으며 더 이상 국가 내부적인 팽창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온 도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팽창의 원리를 국가 밖으로 확장하는 것이고(이는 해외여행 자유화와 맞물려 해외 단기선교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른 하나는 내부의 구성원에게 보다 좋은 경험을 하게 하는데 촛점을 맞춘 것이다. 후자의 도식은 필연적으로 보다 좋은 경험을 제공하는 집단에 대한 신봉으로 나타났고 결국 교회의 대형화를 불러일으켜 이른바 더 좋은 경험을 찾아나서는 교회의 수평이동 현상을 만들어 내게 한 것이다. 실제로 성도의 성장은 꾸준히 이루어졌지만, 이는 교적을 옮긴 교인이 이전교회에서 말소되지 않음으로 생긴 허수의 성장으로, 이미 90년대 초반 부터 한국교회는 신도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본다.


종교를 통해 좋은경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신비주의

  좋은 경험이란 어떤 것인가. 이는 단순하게 좋은 설교, 좋은 음악, 좋은 관계등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들에 충실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종교라는 신앙적인 요소를 개인에게 좀더 임팩트있게 체험하게 하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더욱 좋은 경험을 하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영혼은 정결하다. 나는 종교적으로 좀 더 성숙했다" 라는 것을 체험시키는 것이 신앙인으로서 좋은 경험인 것이다. 이는 부적절한 선민사상을 낳기도 한다. 수 많은 이단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도식이 "우리는 너희와 달라" 이다. 이는 아주 큰 대형교회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것인데, 자세한 책 제목은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세대 교회성장연구소에서 출판한 한국의 메가처치 연구에 따르면 메가처치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차이점이 "우리는 질적으로 다른 설교를 듣고 있다" 라는 점이라고 한다. 즉 더 좋은 종교체험이  집단의 수를 성장시키는데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탁월하다 여길만한 목회자는 드물다는 것이다. 신비주의는 여기에서 출발한다. 결국 나만이 가지고 있는 종교체험의 극단을 보여줌으로 자신의 종교에 대한 깊이를 증명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게 하는 것이 신비주의인 것이다. 이런 신비에 대한 추구는 종교의 말세적 신앙과 결합하기 쉬운데, 이것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이 다미선교회의 휴거 사건이다. 이것이 90년대 초에 이미 나타났음을 주목하라. 

  ​신비주의의 매력은 차별성에 근거한다. 신비주의에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은 더 뛰어난 능력이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능력, 더 깊은 영성에의 추구 이것은 시작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 영역에서부터 시작한다. 매슬로우 욕구단계의 최 상위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넘어서면 더 깊은 영성을 추구하게 된다. 이는 나 자신의 실현을 넘어서 나를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로의 열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치 바벨탑처럼 신에게 좀더 가깝고 싶어하는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는 필연적으로 좀 더 상위에 가깝게 다가간 사람, 보다 고결한 사람이라는 가치를 가지게 만든다. 신비주의의 핵심적인 가정은 사람에 따라 영성의 깊이는 다를 수 있으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 신비적인 일을 알고, 경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비단 신비주의는 단순한 불가사의한 파워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능력추구의 모습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비밀함의 추구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사람이 모르는 나만의 비밀인 것이다.

​   물론 하나님과의 교제가운데 나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비밀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성의 깊이를 재는 척도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매우 심플하다. 구속 성화 영화로 나뉘어 있을 뿐이며 성화되는 과정에서 좀 더 성화된 사람, 좀 덜 성화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인간의 관점에서 차이를 보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 눈에는 다 같은 성화 중인 사람일 뿐이다. )

​   신비를 추구하고, 그것을 좀 더 체험하는 것은 영적으로 더 권위가 있다는 우월감을 준다. 자신은 뭔가 더 특별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선택받은 자, 구별된사람, 그리고 그로 인해 가질 수 있는 더욱 뛰어남. 이는 누가복음의 제자들의 태도와 일맥 상통한다. 예수의 권위를 힘입어 귀신을 물리친 것을 자랑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능력을 자랑하기보다 생명책에 기록됨(구원받음)을 자랑하라고 말하신다.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사실은 이길 수 없는 영적으로 자신들보다 더 큰 대상, 두려움의 존재였던 귀신이 굴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권위로 느껴졌고, 예수님이라는 큰 사람음 모시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자부심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실 때 정점을 이룬다. 제자들은 논공행상을 하며 누가 예수님에게 더 큰 제자인가를 경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입장에서 누가 귀신을 잘 잡고, 더 권위가 있고는 중요함이 아니었다. 예수님에게 영성은 abcdf 의 학점 단계가 아닌 Pass or Fail즉  주의 자녀인가 아닌가의 절대적인 기준인 것이다. 교회는 한 사람이기에 내 몸의 일부인가 아닌가만 중요한 것이다.



 신비주의가 나타나는 이유와 양상


​   그렇다면 신비주의는 언제 횡행하는가. 이것은 외부의 인원을 내부로 끌어들일 때가아닌 내부의 경쟁이 필요로 할 때이다. 외부의 인원엑에 어필하는 매력은 어떤 단계를 보여주기 보다는 모두가 평등하다라는 의미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내부의 경쟁은 이미 포화가 된 상태에서 저 집단보다는 우리 집단이 좀 더 매력적이고 정통적이라는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때문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보이는 근본주의와 신비주의는 함께 결합을 하는 것이다.

  박성업의 신비주의적인 면모가 근본주의적 성향을 띄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워드 매스킹 등의 검증되지 않은 낡은 이론이 나오고 신봉받는 것의 과정을 살펴보면, 사람들에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영의 세계는 불가해 한 부분이니까.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영을 해치는 행동을 하지 말자고 하는 그의 메세지이다. 영을 해친다는 것은 그것이 음란함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매력을 느끼는 것은, 그가 세상의 음란함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 속의 내용보다는 세상이 음란하고 자신은 정결하다 하는 것을 어떻게든 보여주면 된다. 나의 고결함을 증명해 준는 근본적인 성결을 추구하는게 그 매력인 것이다. 

  그에게 미혹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논리는 그는 순수하게 회개를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가 왜 신비주의 인가. 그는 은사나 능력에 미치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을 가감없이 인용하고 있다 라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불가해한 부분에 대해 검증되지 않은 자의적 해석을 통해 사람들에게 고결한 영성을 가진자라는 거짓기쁨을 준다. 마치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로 거짓 기쁨을 주었던 유다의 거짓선지자들과 같은 거짓성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도식의 핵심은 결국 말세의 성결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감정을 주는데 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선택하고 남기는 자의 존재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지만 그것이 누구인지는 인간은 알 수 없다. 그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 성령의 감동하심이주는 확신안에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삶 속에서 우리는 마지막 때를 기다리는 등불의 기름을 예비한 신부의 모습으로 나 자신을 돌아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확신이 하나님이 주신 확신이 아닌 누군가의 선동에 의한 결과라면 어떨까?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고, 나는 무언가 다르다면서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지 못하게 한다면 어떨까? 박성업의 회개는 교회의 영적상황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적인 이분법으로 성결과 그렇지 않은자를 나누며, 교회의 회개보다는 세상의 회개만을 외치고 있다. 그의 회개는 회개가 아니다, 그는 회개를 빌미로 세상을 정죄하고 있으며, 세상을 정죄함으로 크리스쳔을 선동하여 우리편의 선함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제를 기억해 보자. 그의 핵심 사상은 나는 구별되었고, 성결하게 살아왔으며, 종교적이기에. 세속적이고, 탐욕스러우며, 동포를 수탈하는 세리를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바리새인의 가장 치사한 점은 그것을 세리 에게 대 놓고 비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큰 소리로 소리내어 기도했을 뿐. 세리는 왜 눈물을 흘리며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라고 했을까. 그의 회개는 바리새인의 성결함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의 깊은 통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바리새인의 행동은 정죄였다. 

   세상을 정죄하며 나아가는 크리스쳔이 한 몸인 부패한 교회의 통찰과 회개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는 깨끗하고 긍정적이라며 그 내부 구성원들을 자만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미혹의 영이다. 나를 돌아보지 못하게 하는 것, 품어야할 이웃을 공격하는 것,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여기게 하는 것.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거리가 있다. 어떻게 보면 조엘 오스틴, 로버트 슐러 류의 긍정의 힘의 재탕이다. 나 자신에 대한 무한 긍정.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나를 긍정하기 위한 타인부정. 이런 탐욕이 숨어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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