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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목받는 대형교회들은 저 마다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의 신유와 성령의 능력, 온누리 교회의 열린 예배, 사랑의교회의 제자훈련 등은 각 교회를 대표하는 고유명사처럼 여겨지며, 그 교회를 대표하는 독특함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이런 대형교회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대부분의 교회가 고속성장을 경험했고, 그 고속 성장으로 인해 그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엄청난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일견 이런 현상은 타당해 보인다.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탁월한 리더쉽을 보이기에 큰 교회를 이룰 수 있었고, 그것은 해당 담임 목사가 다른 목사들보다 뛰어나다는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자실 목사가 개척한 순복음 교회는 조용기 전도사라는 걸출한 인물의 리더쉽이 발현되며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했다는 일화도 있고, 아파트 교회에서 개척하여 최대 교회 중 하나인 소망교회를 개척한 곽선희 목사의 일화를 보면 이런 논리는 설득력을 얻는 것 같다.

   
원조집의 프리미엄

   콜럼부스의 달걀의 일화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그 일화가 주는 교훈은 창의성의 중요함이고, 얼핏 보기에 쉬워보이는 일도 먼저 생각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시선을 바꾸어 이 일화를 생각해 보자. 먼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콜럼부스가 달걀의 한 쪽 면을 깨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밝힌 이후에, 다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비슷한 조크를 했다가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형교회의 성장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다. 대형교회에 늘 하나씩 있는 신화 중 하나는 고속성장이다. 마치 사도행전의 역사가 일어난 것 처럼, 그날에 믿는 사람의 무리가 엄청나게 느는 것 같은 고속 성장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속 성장의 배경에는 무언가 사람의 구미를 끄는 독특함과 기발함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무언가가 교회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영속적인 뛰어남이라기보다 개척자이기에  받을 수 있는 각광과 프리미엄이라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속성장을 하는 교회를 본받아 다른 교회가 비슷한 프로그램을 들고 같은 지역에서 교회를 세워봤자 이미 식상해진 콜럼부스의 달걀일 뿐이다. 

원조 resturant
무엇이 원조를 이길 수 있겠는가? resturant by riNux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원조집의 프리미엄은 굉장하다. 유명해진 특산음식의 경우도 원조집보다 더 잘하는 집이 생겨도 원조집의 매출을 넘어서기가 힘들어진다. 그만큼 원조가 갖는 배경과 프리미엄은 대단한 것이다. 원조집의 맛을 처음 창시했던 사장이 더 이상 주방에 들어가지 않고, 고용인 주방장이 그 음식을 만들어도 원조집의 프리미엄이 이어지는 것처럼 한 번 갈아 엎어 놓은 밭은 굳이 다른 농부가 와서 농사를 지어도 잘 자라는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밭을 한 번 간다는 것이 힘든일이고, 콜럼부스의 달걀을 처음 세우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 아주 특별한 리더쉽과 능력을 지속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0년째 내용상의 깊이의 변화가 없어 이제는 식상해 보이는 책을 출판하는데도 늘 기독교 서적의 베스트 셀러에 이름을 올리는 어떤 목사를 보면 한 번 뜬 사람은 별다른 노력없이도 그 자리가 유지되는 것 같다는 의구심 마저 들 정도이다.


선점하는 사람이 임자

   그나마 새로운 것을 시도해서 밭이라도 갈아 엎은 목회자는 무언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인정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의 대형교회는 위치상의 이득으로 인해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갑작스럽게 신도시로 개발되어 많은 사람들이 단번에 이주되어 들어오는 경우, 교통이 발달되지 않았던 예전에는 멀리 있는 교회보다 가까운 곳에 있는 교회에 가기 마련이고, 이주 초반에 충성스러우며, 활발한 성도 몇 명을 포섭해 놓으면, 그들이 알아서 지역주민의 수장이 되어 성도들을 모아오게 되어 쉽게 성도를 모으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상가교회던지 이주 초반에 100가정을 먼저 찍으면 그 이후는 많이 모이는 곳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결국 다른 교회보다 먼저 성장하게 되어 그 교회만이 독특함을 가지고 있는 무언가로 포장이 되고 담임목사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상황은 교통의 발달로 서울이나 수도권 근교에서는 이런 신화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재개발이 되어서 뉴타운이 들어서도 쉽게 지하철을 타고 대형교회들로 얼마든지 갈 수 있기 때문에 더 이상 100명 신화는 없겠지만, 수천에서 만 명에 육박하는 중 대형급 교회들 중에는(특히 분당이나 일산같은 대규모 신도시 개발 지역에서는) 이런 형태로 볼륨을 키운 교회들이 은근히 많은 편이다. 그리고 이렇게 교회가 어느정도의 고속성장을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성도들이 목회자를 만들어준다. 자신의 교회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교회의 특별함을 주변사람들에게 알리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기정사실이 되어 그 교회만의 특별함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런 특별함에는 실체가 증명되지 않은 것이 많다. 목회자의 순결함, 겸손함, 영성 등과 같이 오랜 시간 보지 않으면 확실하게 알기 힘든 것들로 포장을 하게 되고, 그리고 그 포장을 계속 쳐다 보면 결국 그게 기정사실로 점점 굳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포장은 점진적으로 교조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목사의 어록이 성경구절과 동일한 포지션을 취하며 성도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며, 목사의 영험함과 신비함을 전면에 내세워 교주처럼 추앙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 목사의 위대함이기보다, 얄팍함을 감추기 위한 신비성의 포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포장되는 목회자

   결국 대형교회를 만드는 것은 특별한 목회자의 리더쉽이라기보다는 많이 모인 성도들의 맨 파워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근간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농부가 탁월해서 농사를 잘 짓는다기 보다는, 땅이 좋아서 심은대로 더 많이 거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람의 특성상 모여서 우리를 만들고 그 우리 안에서 뭉쳐서 하나의 힘을 이루는 것이 탁월하니 단기간에 어느정도만 모을 수 있으면 쉽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이렇게 자리만 잘 잡으면 대형교회 대형 목사가 되는 것이 대형교회의 실제인 것이다. 이렇게 대형화 된 교회의 경우 이제 그 성공신화를 책이나 기사등으로 옮겨 적극적으로 홍보하게 된다. 단시간 내에 이룬 부흥을 성령의 능력으로 포장하고, 담임목사의 리더쉽을 포장하여 출판하게 되면 그가 말한 것은 모두 결과를 가지고 있는 사실이 되고, 모두가 걸어야 할 길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특별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대형교회를 찾게되고 대형교회는 매주 쏟아지는 사람들의 부흥을 겪으며, 마치 용비어천가를 짓듯 그 은혜를 칭송하는 책을 출판하고 목회자의 성공신화로 많은 예비 목회자들을 미혹시킨다. 그러나 그 성공 속의 목회자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고 심는 정도의 역할 밖에 되지 않음에도, 교회 성장의 모든 과정 속에 그 목회자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 현재 대형교회들의 모습이다. 그 목회자가 특별하기 때문에 그 교회가 아니고서는 받을 수 없는 은혜가 있다고 포장되기 마련이고, 그 대형교회를 대신할 교회가 성도들 마음에서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 마음 속에 자리잡은 특별함에 대한 선민의식은 자신을 좀 더 돋보이게 하고, 다른 교회 성도들 보다 자신을 좀 더 낫게 여기는 교만함의 마음으로 성장하게 한다.

  그러나 과연 대형교회라는 그늘을 거두었을 때 개개인 성도의 모습은 어떠한가? 목회자의 모습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모습인가? 목회자는 거듭되는 스케쥴에 개인 묵상시간 마저 충분히 가지기 힘들고, 성도들은 거룩한 무리를 떠나면 그냥 일반인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실상 아닌가? 변화의 능력도, 성결의 능력도 없으면서 무언가 변화 된 것은 단지 숫자의 증가임에도 놀라운 은혜가 임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도행전의 역사의 놀라움은 그날의 믿은자의 수가 오천이 더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변해서 죽음을 불사하게 되고, 자신의 것을 나누며 생활 자체가 완벽하게 변한 것이다. 

    단지 믿는 무리의 숫자가 더하는 것은 사이비 종교에도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숫적인 우세를 제외한 진정한 깊이있는 생활의 변화가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전교인이 한 마음으로 통회하며 회개하거나 어떤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 이런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적극적인 사람들이 10%만 움직여도 수천이 움직이기에 모든 교인이 움직이는 듯 보이나, 그것의 실상은 10%의 그늘에 가려서 움직이지도 동요하지도 않는 90%의 교인이 교회의 대부분이고, 그들은 움직이지도 않으며 교회의 그늘 이 자신의 공인 것처럼 교만함에 빠져있다. 

    다음글에서는 이 움직이지 않는 90%를 키우느라 버거운 대형교회의 현실과 수평이동으로 늘어나는 모종을 키워내는 비닐하우스로 전락한 대형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적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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