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행동에 이르게 하는데는 단계가 있다. 각각의 단계에 따라서 그 움직임의 폭은 다르며, 낮은 단계에서는 사람을 움직일 어떤 힘도 얻지 못하지만, 최고의 단계에 이르면 감동을 준 대상에 대해서 자신의 최고의 가치도 바뀔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곤 한다. 사람의 마음이 움직여 행동에 이르는 것은  사건의 진위 여부와는 상관 없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싸인에서 나오는 이명한 원장처럼 원하는 조건이 맞으니 진실과는 상관없이 움직이게 된 것과, 진실을 이야기하는 윤지훈의 움직임이 계속 제한되어 결국 그가 죽음으로서 밝히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온 것과 같이, 내가 가진 것이 진실이어도 상대방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고, 설령 거짓으로 이루어진 조작된 사건도 그것이 어떤 단계를 거치게 되면 거짓을 위해서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계


   그렇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단계에는 어떤 단계가 있을까? 먼저 대상을 알아가는 단계이다. 앎이라는 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그 대상을 판단할 기준이 되는 첫 번째 단계이다. 서로를 알지 못한다면 당연히 그 대상을 위해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행동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성경은 "여호와꼐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행하신 일을 잊지 않아, 조상들의 완고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충성된 세대가 되게 하기 위해서 라고 말하고 있다.  완고한 길을 걸었던 조상과 그들의 차이는 조상들의 행실과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는 앎의 차이였던 것이다. 신뢰할 대상을 온전히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도바울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두 번째의 단계는 아는 지식을 신뢰하는 단계이다. 이는 대상에 대해 알게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 들이는 단계이다. 사실 대상과 그 주장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해서 바로 행동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 대해서 점검해 보고 움직일 만한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인간 행동의 단계인 것이다. 이것을 생략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귀가 얇아 자주 사기를 당하는 사람이거나, 판단력을 상실한 심신상실의 상태와 같을 것이다. 예전에 선교단체 시절 우리가 쓰는 교재에는 고장난 비행기의 그림과 온전한 비행기의 그림을 비교하며 어떤 것이 믿을만한 비행기인가를 비교하며 건전한 믿음을 비교한 그림이 있었다. 고장난 비행기를 타며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것은 신뢰할만한 대상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기에 근거도 없으며 건전하지도 않은 믿음이라는 이야기 이다.

   세 번째 단계는 공감의 단계이다. 대상과 주장을 진실이라 신뢰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감흥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실에 그치지 사람을 움직이는데에 이르지 못한다. 공감이란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사람이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동기가 필요하고, 그 동기를 행동으로 옮기는데에는 정신적인 작용이 필요하다. 여기서 발생하는 긍정/부정적인 정서들은 행동을 증가시키는데 영향을 끼친다. 공감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행동에 옮기고 그 행동을 지속하기 까지의 정서(감정)의 단서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감정의 공유를 통하여서 사실을 신뢰할만하다 인정하고, 그 뜻에 공감한다면 그때야 사람은 움직이게 된다.

   그러나 공감의 단계에서의 행동은 몇 가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사람의 생각이 다르기에 정서의 공유가 오래 갈 수 없고, 상황이 바뀌면서 변화하는 것이 감정이기에 공감에 이르렀다 하여도 상황에 따라, 당시의 공감이 사라지는 것도 비일비재한 일인 것이다. 물론 공감이 사라져도 다른 이유를 만들어내어 행동을 합리화 하기도 하지만, 이미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과, 상황이 달라졌다는 점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하는 동상이몽의 상태가 되기도 쉽다는 것이다.
 

<삼고초려는 제갈량이 목숨어린 충성을 다하게 하는 감동이었다>
  
   마지막 단계는
감동의 단계이다. 공감은 타인의 정서에 일시적으로 동기화 된것이라면, 감동은 자기 자신의 정서(감정)가 움직인 것이다. 이는 상황이 변화거나 정서의 공유가 사라졌다고 해도 이미 자신의 감정이 움직였기 때문에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며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게 된다. 허구가 섞여있다고는 하지만 제갈량을 움직였던 유비의 삼고초려는 제갈량에게 감동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출사표를 던지며 노구를 이끌고 불가능한 싸움을 싸우며 죽어갔던 것이다. 난세에 유유자적하던 학자의 가치관은 감동적인 마음의 울림을 거절하지 못하였고, 그 움직임은 그의 평생을 가져갔던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겸손함의 감동, 부활을 통해 입증된 하나님의 본체의 충격적인 감동은 그들을 "돌로 치는 고통, 톱으로 켜고, 칼로 죽임을 당하는 고통,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는" 비참한 상황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는 감동이 되었던 것이다. 


신뢰를 잃어버린 교회


   최근 인터넷에 올라오는 교계인사들의 발언과 관련된 뉴스나 기독교 신자들의 행동과 관련된 뉴스의 밑에 달린 네티즌의 덧글이나, 신문의 사설들을 보면 한국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이미 전도나 선교가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전도와 선교가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사람을 움직여 하나님께 데려와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이라고 볼 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위의 네 단계를 거쳐야 제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복음을 알고 그것을 진실이라 신뢰하며 그 진실에 공감하고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야 비로소 제자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데, 이미 한국교회는 신뢰의 단계에서 그 주장이 진실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야기 하고,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이미 한국 교회의 윗물인 성직자는 금전적 문제, 성적인 문제, 권력욕 등으로 공의가 굽었고. 아랫물인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이나 생각과 다른 신앙이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원수로 생각하며 배타적인 생각과 행동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신문을 메우는 기사는 교회 지도자들의 실언과 범죄에 관련된 뉴스이고, 그 밑의 덧글은 배타적인 크리스쳔들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의 저주성 안티 댓글이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선행을 하고 기부를 하는 연예인이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단체의 미담에도 단지 크리스쳔이라는 이유만으로 심각한 악플을 달게되는 상황까지 왔다.

<선행하는 크리스쳔으로 유명한 연예인 차인표 신애라도 악플러에겐 개독신도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성도들은 오히려 상대를 불쾌해 하고 반박 하거나 심지어는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등 뒤로 한 채, 열심히 전도를 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알도록 종용한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지 않고 오히려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반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지식을 반박하고 올바를 지식을 전해 줄 수 있을 정도로 크리스쳔들이 올바르게 알고 있는 경우도 극히 드물다. 그저 전도 훈련 중 배운 몇 가지의 매뉴얼과 반응 방법, 설교시간이나 소그룹 모임간에 줏어들은 얇은 지식만을 일방적으로 말한 채 피하는 것이 크리스쳔의 앎을 전달하는 태도이다. 결국 제대로 된 앎을전달할 방법이 없기에 전도는 교회 전단지에 사탕을 붙이거나, 교회에서 자체 제작한 좋은 글이 담겨있는 신문을 가지고 지하철역에서 뿌리거나, 추운날 커피를 나눠주는 것이 전도의 방법이 되어버렸다.(물론 이런 행동들이 전혀 의미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행동들이 전도하는 사람에게 믿음의 행위를 하는 행동적 도전이 되고 그로인한 은혜를 경험하는 결과가 될 수는 있지만, 믿지않는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라 생각한다.)


신뢰를 회복하려면


    지상명령이 땅끝까지 예수의 증인이 되어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는 것이라면, 모든 족속이 그 마음에 초대교회 성도들 같은 감동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그리스도를 제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감동은 커녕 공감도 얻지 못하고있고, 이제는 신뢰마저도 잃어버렸다.(잃어버리고 있다라고 쓰려다 현실을 보니 이미 교회에 대한 신뢰는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리를 전하는 것과 동시에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사람을 움직이는 감동의 단계에 나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전 교회 차원의 합심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이 합심과 회개는 단지 새벽에 나와 울어제끼고 속 시원해지는 그런 회개가 아닌 진정한 회개, 즉 변화가 있으며, 동시 다발적이어야 하는 회개여야 한다. 마치 오순절 마가 다락방처럼, 조나단 에드워드의 1차 대각성 시기처럼, 평양 대 부흥처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믿는 사람이 변화되는 놀라운 일이 아니고서는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할 수는 없다. 

   지금 교회가 사회에게 긍정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것은 포기와 내려 놓음일 것이다. 물론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는 요원하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교회가 교계인사나 성도들의 범죄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당사자를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형제,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하고 국민들 앞에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교회가 각 건물을 포함한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현 건물을 단지 모임의 장소로만 사용을 하는것. 불필요한 주 중 모임이나 강해를 줄이고, 그런 모이는 시간을 사회를 위해서 활용하는 것(봉사등). 강해나 모임은 철저하게인터넷과 스마트 폰등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배우고 익명적 공동 질문으로 위엄에 눌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의문을 모두 해소하는 것. 새벽시간에 시끄러운 앰프음과 음침한 곡 소리(밖에서 교회앞을 지나가다 들으면 신자들 조차 그렇게 듣는다)를 줄이고, "밤새 술먹고 토하고 흥청망청한 사람들의 연약한 심령을 보호하소서" 라는 기도를 하며 거리를 청결케하는 전국적인 새벽 청소 운동. 헌금시간을 폐하고, 온라인 입금을 장려하여(온라인 입금도 익명성 보장이 가능) 자금의 운용을 투명하게 하고, 예비비를 남기는 집행이 아닌 사역을 디자인하고 모금하여 사역하는 모금제로 전환하는 것.(특수사역의 경우 특별모금, 부서 고정비의 경우 월 회비제로 운용) 십일조를 하기 원하는 사람은 교단으로 입금하게 하여 절반은 교단에 소속된 전임사역자 복지(연금등)에 사용하고 절반은 불우한 이웃을 돕는데 쓰도록 하는 것.(교단은 투명하게 자금 집행할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감사를 받고, 내역을 공시.) 

   길게 나열했지만, 결국 긍정적인 충격을 위해서, 구습과 분주함을 내려놓고 가볍고 경량화된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할 때,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라고 하였다. 모임을 없애고, 건물 및 재산을 없애고, 헌금시간을 없애도 교회가 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모임을 없앰으로 생활 속에서 개인 적으로 성도가 서로 만나는 시간을 늘일 수 있고, 건물 및 재산이 없음으로 재산 다툼과 분쟁에 쓸 힘을 복음을 증거하는데 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량화를 통해 가벼워진 교회는, 기름이 덕지덕지 낀 교회에 대한 혐오스러운 시선을 거두게 될 것이고, 그것이 신뢰로 이어져 어느순간 공감과 감동이 올 수 있을 것이다.  
 
<가벼워진 몸으로 다시 뛰는 한국교회가 되길>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