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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23.
IIT목요모임
6:1~5

지금의 세상은 수 많은 경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이키의 경쟁상대는 닌텐도다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현대의 세상은 경쟁논리로 존재 가치를 표현하려고 하는 시도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각자의 목표는 다를지라도, 비슷한 목표를 가진 누군가와 경쟁을 하는 것은 현 시대의 가장 당연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행동입니다. 경쟁을 통해 승리한 사람은 패배한 사람보다 나은 어떤 하나를 더 얻게 되어있습니다. 100미터 선수는 달리기라는 경쟁을 통해서 금메달을 얻고, 학생은 공부라는 경쟁을 통해서 더 좋은 성적을 얻습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경쟁이라는 것이 처음 나타난 것은 청동기와 도구의 발달로 잉여자원이 발생하게 된 시점부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잉여자원이 발생하게 된 시점부터 잉여자원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적게 가진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고, 이것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화폐가 생기고, 국가가 생겼기에 이 잉여 자원을 더욱 많이 얻기 위해 경쟁이 생겼다는 것이 역사의 설명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경쟁이 생겨나게 된 원인이 바로 잉여 자원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잉여자원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남는 부분이라는 뜻입니다. ,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지장이 없는 것. 이것이 경쟁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잉여자원의 정체입니다     


       성경은 경쟁이 낳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를 최초의 살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인은 동생 아벨과 하나님의 사랑을 놓고 경쟁하여 살인이라는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표현은 얼핏 듣기에는 좋은 이야기로 들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누군가가 더 많은 것을 얻고, 누군가는 얻지 못하게 되는 경쟁의 특수성을 볼 때 결국은 허울 좋은 이야기일 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경쟁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한 행동은 인간의 본성이고, 인간은 버리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가 아닌 얻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영리의 첫 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는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로 무언가를 얻게 하시려고 그 계획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경쟁을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 5절에서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팔복 설교로 잘 알려진 이 말씀의 세 번째 복은 온유한 자의 복입니다. 이 말씀에서는 분명히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임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경쟁을 하는 자가 그의 열심으로 기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가 그 땅을 기업으로 얻는 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풍성히 얻게 하는 비밀은 온유함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온유함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온유함은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의 하나 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온유함이라는 것은 성령충만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말씀에서도 신령한 너희는 온유함으로 바로잡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령한 너희, 즉 성령으로 충만한(Spiritual) 사람이 온유함으로 범죄한 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2:3에서는 이 사람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전의 나오는 사건은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판 사건입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대하는 모세의 태도를 모든 사람들보다 월등한 온유함이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론과 미리암의 태도와 다른 모세만의 특징적인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모세의 형제들은 그에 대하여 여호와가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셨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주장입니다. 합리적이고 합당한 이야기가 바로 모세의 태도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는 합당해 보이는 비판에 자신의 상황을 나타내기 보다 침묵하는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하나님의 판결로 미루어 보아, 모세는 아마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성경은 온유하다 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온유함이란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그것을 경쟁적으로 쟁취하려고 노력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참는 것이 바로 그런 태도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으로서는 온유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히브리서 11 26절의 말씀처럼 모든 능욕을 오히려 귀한 것으로 여기는 겸손한 태도가 있었습니다. 비판에 대해서 속으로 부글부글 끓으면서, “그래 하나님이 모든 것을 판단하실 것이야.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이 확실하니 하나님이 신원하시겠지라는 태도는 온유한 사람의 그것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향한 악의적인 비판에서도 그것을 담담하게 받아내는 것, 상대의 모습을 자신의 허물로 바라보는 것을 온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참 재미있는 표현이 있는데, 2절에서보면 서로 짐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되어있고, 5절에 보면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불과 3절을 사이에 두고 크나큰 반전을 이루어 서로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유함으로 상대를 바로 잡는 태도의 정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온유함으로 상대방을 바로잡을 때, 자신의 시험 받을 것을 주의하라고 말하면서 서로 짐을 지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온유한 자의 바로잡음은 책망과 정죄가 아닌 상대의 짐을 들어 주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상대의 짐을 들어준다는 것은 단지 상대의 잘못을 수습해 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 지라라는 것은 그것을 운명의 공동체로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발견하고 그 허물에 대한 책망의 거리가 생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서로 지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경쟁을 통해 기업을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경쟁의 마음은 끊임없는 비교를 낳습니다. 3절 말씀에 누군가가 스스로를 Something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Nothing이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이겨 특출남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 성설이라는 것입니다.



       4
절 말씀에서 자랑할 것이 남에게 있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Comparing 하는 것이 Pride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남의 모습을 비교하고, 그의 잘못된 부분과 경쟁하여 상대의 허물을 상대를 끌어 내리는데 사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경쟁에서 승리하는 태도이기는 하지만, 기업을 얻는 온유함의 태도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허물을 생각하기보다 다른사람과 비교하고, 그 비교 속에서 자신은 우위를 지키고 있기에 나는 더 나은 사람 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세와 그의 형제들은 양 측 다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해결하는 태도에 있어서 하나님은 온유한 모세를 선택하셨습니다. 모세의 마음 속에서 아론과 미리암의 허물은 곧 자신의 허물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5절의 말씀이 결국은 2절 말씀과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상대의 짐이 나의 짐이기 때문에 상대의 짐을 지는 행동이 나의 짐을 지는 행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업을 얻는 사람의 온유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욱 온유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분명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특히나 큰 일을 준비하고 움직임에 있어서는 잘잘못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 속에서 자칫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서 공의를 펼치기 위해 형제를 판단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역시 많습니다. 때로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비판을 받게 되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비판 속에서 상대방에게 불합리함을 느끼고 그것을 터트리기 위해 이를 갈며 하나님이 판단하실 거야라는 말로 참아내리는 것은 미봉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해결책이 될 수는 없으며, 더욱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업을 얻기에는 요원한 일이 될 것입니다. 기업을 얻읍시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짐을 서로 져서 온유함으로 잘못을 바로잡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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