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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묵상

젊은이여 신중하라

Reg Teddy 2008. 4. 11. 07:10

본문: 디도서 2:6

일시: 4/10

대상: IIT 캠퍼스 모임

 

저는 가끔 이전에 있었던 하나의 분기점들을 생각해 봅니다. 내가 만약 그때 그렇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그때 열심히 했다면, 나의 삶은 더욱 좋아졌을까? 또한 제가 했던 많은 실수들을 기억합니다.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떠했을까? 그 실수가 없었다면, 나는 더 잘 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사람들은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실수들은 나이가 들면서 줄어가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많은 실수를 하지만, 그 일에 익숙해 지면서 점차 실수가 줄어드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해야 할까요? 인간은 스키마라는 방법을 사용하여 정보를 해석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가치관이 되어 내가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는 하지요. 이런 스키마가 점차 모양을 갖추어 갈수록 실수는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경험이 일천한 청년의 시기에는 분명 실수가 더 많아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실수와 실패의 정점에 서게 되는 때는 다름아닌 대학생 시절입니다. 저도 그렇지만, 여러분도 대학생이 되면서 각자의 집에서 떠나와 자기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을 경험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실수를 하여도 그것을 보호해 주는 부모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면, 지금 여러분의 주변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보다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부모의 보호에서 떠난 단독자 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디도서는 목회 서신으로 바울이 자신의 제자인 디도에게 성도들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쳐야 좋을 지를 알려주는 슈퍼비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장은 각 지체들에게 어떻게 말할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 중 6절은 청년들에게 권고할 말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아주 간단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신중할 것을 권면하라개역 개정에는 신중할 것을, 개역성경에는 근신할 것을 이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NIV에는 Self Controlled, KJV에는 Sober Minded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젊은이들이 가져야 가장 중요한 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늙은 남자들에게 역시 신중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 덛붙여 절제, 경건,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인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노인에게는 많은 미덕을 지킬 것을 이야기 하면서, 젊은이들에게는 한가지의 이야기만을 할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첫 번째로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신중함 이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그만큼 들어먹지를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젊은 시절에 신중함을 가지면, 늙은 시절에 절제와 경건, 믿음과 사랑 그리고 인내로 온전하게 됨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의 시기에 실수가 많아질 수 밖에 없음을 아까도 이야기 했는데요, 경험의 부족도 그렇지만, 경험 이후에도 실수가 반복되어지는 것을 가끔 목격하고는 합니다. 바로 후회하면서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죠, 마치 시험 전 주에 잠깐 머리 식히려고 했던 게임이 한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되고 하여 결국 시험을 망치게 된 한 사람이,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며 다음시험에서 만화책을 다운받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실수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행동을 하게되는 원인을 따져보면 결국 자신과 자신의 상황을 진지하게 보지 못하고,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신중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이런 신중하지 못한 태도는 결국 청년기의 중요한 시간을 빼앗게 됩니다. 전도서는 청년의 때의 먹고 마심이 헛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청년기의 신중하지 못함은 후일 큰 영향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중하라는 이야기는 독자적으로 하지 않으면 듣지 않습니다. 다른 말들이 들어가게 되면 그 곁가지가 되는 말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결국 신중하라는 입에 쓴 이야기는 그 귀에 도달하지 않게됩니다. 그간 꾸준히 많은 일을 하며 젊은이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으나, 그들의 귀에는 그 노력의 단어가 전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을 보며 그들에게는 듣기 싫어도 그 한소리를 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변형을 거쳐 결국 복음이 희석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즉 신중하게 생활하라는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정확하게 전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청년의 습성때문이라는 것이죠.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마음이 여러분들 안에 없고 그것을 해석하는 기준은 더할 나위 없이 모호 합니다. 그렇기에 이 하나의 말이 아니면 청년은 이해 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이런 신중함을 갖게 된다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실패를 줄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어떤 방법으로든 청년은 실패를 경험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번 한국의 대선에서 홍정욱이라는 사람이 당선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엄마 친구 아들, 실패를 모르는 사람 이라고 하는데,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결국 그런 실패를 모르는 안정적인 그의 성향이 그의 그릇을 좁게 만들고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적을 만들지 않고 쉽게 가려는 그의 태도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낮추고 있다는 것이죠.

 

신중함으로 실패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또 줄일 수도 없죠. 실수는 어떻게든 따라오는 경험부족의 결과이니까요. 대신 신중함과 근신함으로 그 실패를 하나의 공부로 만들 수 있습니다. 변화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신중함은 실패의 근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합니다.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 오리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그의 실패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고 더욱 성장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지식의 일천함이나 그간 있었던 실수와 실패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저도 역시 지금도 실수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좀더 신중하게 그것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주실 것, 은혜를 기다릴 때, 분명 늙어서 절제 경건, 그리고 인내를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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